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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禮정신과 義 - .....가. 계백 장군의 (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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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의 大臣 성충이 의자왕에게 간(諫)하다 옥(獄)에 갇히자 그 어느 누구도 감히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성충이 옥중에서 죽을 때에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된 마음에서 왕에게 「신이 항상 시세(時勢)의 변함을 보니 반드시 큰 싸움이 있을 듯 합니다. 만일 외국 군사가 침입하거든 육로에 있어서는 탄현을 넘게 하지 마옵시고 수로에 있어서는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와 험하고 좁은 목에 웅거하여 막도록 하시옵소서」하는 글을 올렸으나 의자왕은 이런 말을 귀에 담지 않았다.
의자왕 20년(서기 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동맹을 형성하여 당에서는 소정방, 유백영등이 십만 대군을 이끌고 성산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에 이르고 신라의 김유신은 정병으로 진격해 왔다.


이와 같이 수륙 양면으로 침략을 받게되자 백제 측의 작전계획은 자못 구구했다. "싸워 승부를 결단하자"는 측과 "접전을 피하여 적으로 하여금 피로케 한 다음 쳐부수자"는 의견이 있어 쉽사리 결정을 못하였다.
이 때에 또 다른 충신이 있었으나 옥에 갇혀 있던 장수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어보았더니, 흥수 또한 성충의 의견과 같이 백강(白江)과 탄현(炭峴)을 굳게 지켜 적의 군사가 피로하고 군량과 물자가 떨어짐을 기다려 공격하도록 진언(眞言)하였다.


그 당시 시기와 의심을 품고 있던 백제의 대신들은 홍수가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므로 임금과 나라를 원망할 터인즉 그의 말을 믿지 못할 것이라 하여 도리어 반대되는 계획을 세웠다.
즉 당나라를 백강(白江)에 들어오게 하고 신라군을 탄현(炭峴)에 오르게 하여 적을 좁은 곳에 넣은 다음 군사를 풀어 마주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어느덧 나·당 연합군은 각각 백강과 탄현을 지나 점점 수도인 사비성(泗批城)에 가까이 쳐들어오는지라 이에 백제는 용장(勇將) 계백을 시켜 먼저 신라군을 막으라고 했다.
그때에 형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계백은 최후의 각오를 굳게 하고 결사대 오천명을 뽑았다. 그리고는 집으로 달려가 「한 나라로서 신라, 당나라에 당하게 되니 나라의 존망을 알지 못할지라 나의 처자도 적의 종이 될지 모르니 살아서 욕을 당하는 것보다 쾌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며 그의 처자를 모두 참하고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들에 나아가 신라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고 얼마간은 신라군을 능가하는 위세를 유지하였으나, 반굴, 관창과 같은 화랑도들의 활약에 의한 기세가 오르게 되자 계백은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적은 병력으로 끝내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하여 사졸 들과 함께 장렬한 전사를 하니 이것이 백제의 마지막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