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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禮정신과 義 - .....나. 이순신 장군의 (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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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이 없는 사람이 군대를 따라 전장에 참가하는 것을 백의 종군이라고 한다.
1597년 4월 1일, 충무공 이순신은 28일간의 옥고를 치르고 백의 종군을 하게 되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녹이 쓴 대포와 군도, 줄이 풀어진 활, 민폐나 끼치고 있는 병사들, 바로 이들을 이끌고 왜구의 침략에 감연히 맞서 연전 연승을 거두었다. 장군에겐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승 비결은 잠시도 소홀함이 없는 상황판단이었다. 그는 항시 척후를 사방에 배치해 적의 동태를 끓임 없이 살피게 했다.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면 그 작전은 벌써 절반은 성공함 셈이다.


이순신은 잠자리에서조차 눈과 귀를 열고 있는 것 같았다. 융복(戎服=군복)을 24시간 입고 있었다. 언젠가는 꿈속에서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일어나라 일어나! 적이 쳐들어온다』고 타일러 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노량 해전에서 승리를 거둘 때의 일이다. 그만큼 이순신은 마음을 놓지 않고 있었다.
부서진 배 12척으로 왜선 1백 33척을 무찌른 명량해전 때였다. 그날 따라 달이 유난히 밝았다. 이순신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군은 달이 없을 때도 우리를 기습하거늘 이렇게 천지가 밝은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척후를 보내려고 했으나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그들을 깨워 적정을 살피게 했다. 과연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상황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충무공에겐 또 하나 남다른 전술이 있었다. 진두지휘, 그는 어떤 해전 장에서도 선두에 서서 싸웠으며, 끝내는 진두지휘를 하다가 노량 해전에서 장렬한 전사를 했다.
그의 근엄한 일면은 여성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전란을 치르는 7년 동안 그는 한번도 여자와 가까이 한일이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그는 금욕적이었다. 하루는 전장에서 부인이 위급하다는 전달을 받았다.
그는 후일 난중일기에서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른 일이야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나 병사들에겐 다정하고 엄한 아버지와 같았다. 잠자리와 식사를 따뜻하게 돌보아 주었지만 싸움 앞에서는 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령과 기회만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순신의 그와 같은 성품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더구나 이순신이 통제사가 된 것을 시기하던 원균은 그런 충무공을 모함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일본군의 이중첩자 '요시다'가 계략정보를 전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순신은 선조 임금의 진노를 샀다. 왜군이 쳐들어오는데도 조정을 속이고 왜군을 치지 않았다는 모함이었다.
그러나 의로움은 외롭지 않았다. 판중추부사(從一品 벼슬) 정탁(鄭琢)은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렸다.


 『……일개 순신의 죽음은 진실로 아깝지 않사오니 그의 죽음이 나라에 있어서는 관계됨이 가볍지 아니함으로 어찌 이것이 중대한 사실이 아니옵니까?』
마침내 선조는 노여움을 풀었다. 3군 수군을 통괄하던 통제사의 직위는 없어지고 다만 직함 없는 백의의 몸으로 권율 장군의 막하에서 종군하게 되었다.
때마침 모친의 부음까지 들어 그의 가슴은 더없이 아팠다. 그러나 재침을 노리는 왜군의 거동이 수상한 전황은 그의 슬픔을 돌아볼 겨를을 주지 않았다. 이순신은 모친의 장례에도 참석치 못하고 전장으로 나갔다.


전장에선 원균의 군사가 대패하여 사태가 어렵기만 했다. 다시 3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충무공은 저 유명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마지막으로 노량해전을 맞았다. 적탄이 그의 가슴에 날아들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그는 끝까지 위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