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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禮정신과 義 - .....다. 의병장 조헌 선생의 충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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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헌 선생(重峰, 趙憲,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의병장, 임진 4충신의 하나)의 이야기다.
율곡 선생이 감탄하기를 "몇 번이나 대궐 난간을 꺾고, 몇 번이나 임금 옷자락을 끌어 당겼던고?"라 했다. 임금께 올린 상소문(上疏文)만 해도 수십만 자가 되며, 끌어내면 대궐 난간을 붙들고 늘어졌고, 임금이 피하면 그 옷자락을 붙들고 곧은 말을 하는데, 마치 어린애 같은 직정이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해에,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도끼 하나를 든 다음, "왜란이 일어나니 대비하시오."라는 소를 올리고, 이 소가 불착하거든 도끼로 목을 쳐 달라고 며칠동안 엎드려 있었다고 한다.
급제하여 향실(香室)의 집사로 있을 때, 대비가 불공에 쓸 향을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이 방에 있는 향은 사전(祀典)에 기록되어 있는 제사에만 쓰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데 쓴다면, 신이 비록 만 번 죽더라도 봉하여 올리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거절하였다. 대비가 달라는 하찮은 향마저 불법이면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만 있어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세태와 세상에서도 인품이 이 정도는 되어야 가히 인격자요, 지도자이며, 공인이라 할 것이다. 옛날에, 임금에게 "마마, 절대로 아니 되옵니다."라고 한 충신이 있었듯이, 지금 대통령에게 "각하, 절대로 안됩니다."라고 하는 장관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 절의 있는 곧은 사람을 요망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비록 우리에게 승전의 기쁨을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자주국방의 신념을 불어넣어 준 하나의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눈부신 항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의병장 조헌(趙憲)의 항전은 특히 후세 역사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왜란이 일어나자 조헌은 그이 문하생들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아서 처음에는 보은을 방어했다. 그러자 장정(壯丁) 다수가 호응하여 향병의 수는 많아지고 사기도 높아졌다. 공주 목사 허욱은 승려 영규(靈圭)로 하여금 승군을 일으켜 조헌을 따르게 했다.
 조헌은 1592년 8월 초하루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청주로 영규대사와 함께 군사 7백명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다. 관군에게는 그들의 뒤를 이어줄 것을 재촉했다. 8월 18일 조헌과 영규는 마침내 금산성 밖 10리 지점에 이르러 진을 치고 전라도 관군을 기다렸다.
이때 왜군은 조헌의 진영 중 수방지역이 취약함을 알아차리고 조헌의 배후를 차단하고 공세를 취했다.


조헌의 군사와 승군은 분전했지만 지원부대가 없는 고립 속에서의 작전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이 떨어지자 조헌은 장막 안에 앉은 채 눈썹하나 움직이지 않고 적을 맞았다. 그의 군사들은 비록 맨손으로 적과 맞서 싸웠지만 도망을 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아들 완기(完起)의사도 부친(조헌장군)의 시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장군의 옷을 갈아입고 적진에 돌진 순절하시므로 마지막까지 효충을 다 이루었으니 부자가 충효를 다 이룩하신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맞아 맨손으로 혹은 연장을 들고나섰던 의병은 수 만명에 이르지만 군사지식, 훈련, 장비에 있어서 왜병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숨을 다해 적과 싸웠던 의병들의 무용담은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