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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禮정신과 義 - .....바. 안중근의사의 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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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忠

한말의 교육가·의병장·의사(義士). 본관은 순흥(順興). 황해도 해주 출신. 아버지 진사 태훈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의 3남 1녀중 맏아들이며, 아내는 김아려이다. 어려서 아버지가 만든 서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사서(四書)와 역사책을 읽었다. 26세에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지면이 있는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국내에서 교육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어 반일운동을 행동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범윤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김기룡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명이 되자 김두성·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하여 비밀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 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그러나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다. 천신만고로 탈출한 뒤 흑룡강의 상류 수 천여리를 다니면서 이상설·이범석등 애국지사를 만났다.


  국민회·일심회·동의회를 조직하여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훈련을 담당하였고 1909년 3월 2일에는 김기룡·엄인섭·황병길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를, 김태훈은 이완용을 암살 제거하기로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서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써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하여 만주에 오게됨을 알게 된 안중근은 우덕순·조도선·유동하와 저격 실행 책에 대한 중대모의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드디어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에 도착,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려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하고 있던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이 뛰어나오며 권총을 발사,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안중근은 "한국의 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힌 다음 거사 동기를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 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군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여섯 차례의 재판을 받았는데 안중근은 일반 살인피고로 취급하지 말고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하였다. 국내외에서 변호 모금운동이 일어났고 변호를 지원하는 인사들이 여순(旅順)에 도착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본인 관선변호사 '미즈노'와 가마타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하였다.


  재판과정에서의 그의 태도와 정연하고 당당한 논술에 일본인 재판장과 검찰관들도 내심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언도공판은 1910년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에 개정되었는데 재판장 '마나베'는 사형을 언도하였다.


  죽음을 앞둔 며칠전 정근·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 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객사한 사람을 고향에 옮겨 장사를 지내는 일)하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 감옥형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애국심으로 응집된 행동의 인간상으로서 그의 행동은 총칼을 앞세운 일제의 폭력적인 침략에 대한 살신의 항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