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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孝禮정신과 義 - .....사. 윤봉길 의사의 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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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4월 29일 그날은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 전쟁에서이긴 전승 축하식을 겸하는 날이었다. 비상한 각오를 한 윤봉길 의사는 야채 상인의 몸차림으로 축하식이 열리는 홍구공원을 배회하며 자리를 익히는 한편, 왕응에게 부탁해 물병과 도시락 모양의 폭탄을 입수했다. 거사의 날은 왔다. 그날 아침 윤봉길과 식사를 함께 한 김구는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고 그의 모습을 술회한 일이 있었다. 그날 일본군은 이른 아침부터 상해 시가에 기갑부대를 풀어놓아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비행기가 하늘을 덮어 그야말로 지축을 울렸다.
  윤봉길은 새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한 어깨에 물통을 메고 한 손에는 도시락을 들고 식장에 들어갔는데 그날 따라 홍구공원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드디어 식이 시작되고 「일동 묵념」의 소리와 함께 식장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윤봉길 의사는 식단의 중앙으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천지를 진동시키며 폭발했다. 폭음이 충전하고 피가 튀는 순간, 윤봉길은 「대한독립만세」를 우렁차게 외쳤다.
  윤봉길은 일제의 재판을 받고 그해 12월 19일 총살형을 받았는데 형장에서 형무소 장이 그에게 유언을 허락하자 "남아로서 당연히 할 일을 다 했으니 만족하게 느낄 따름이다. 미련이 없다."고 의연하게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아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너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서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그때 윤봉길은 나이 25세, 1946년 그의 유해는 일본 오사카에서 다시 고국으로 모셔와 국민장으로 조국의 흙 속에 안장되었다.
  그의 얼은 지금도 그의 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리 충의사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뒷날 중국의 장개석은 "중국의 백만군사도 하지 못한 일을 대한의 한 의사(義士)가 해냈으니 장하도다!"라고 최대의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